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명량 해전 (문단 편집) === 함선 스펙상의 우위 === 조선군과 일본군은 끝내 함선의 잔인할 정도의 스펙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고, 일본군은 조선군의 함대 규모를 보고 그동안의 스펙 차이로 인한 참패들을 잊고 돌격을 결정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판옥선과 세키부네의 체급 차이를 무시하고 울둘목의 지형만 생각해 아타케부네를 투입하지 않았다. 이런 점들이 전투의 승패를 갈랐다. <고산공실록>에 따르면, 일본군이 전투에 투입한 함선은 대부분 [[세키부네]](80명 탑승)였는데, 이에 반해 조선의 주력함이었던 판옥선(130명 탑승)은 해상의 성이라 불리던 아타케부네(290명 탑승)와 비슷한 크기였으니, 조선군이 가뜩이나 격류인 [[울돌목]]에서 질적 우위를 확보하고 전투를 펼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판옥선의 구조 자체가 철저하게 한 가지 기능, 즉 연안에서 화포를 쏘기 위한 포대 겸 장벽으로 사용하려는 목적만을 위해서 설계된 구조였다. 애당초 물목에서 통행세를 걷기 위해 치고 빠지는 전략을 목적으로 설계된 일본군의 세키부네보다 몇 배는 더 튼튼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배끼리 부딪치더라도 세키부네가 먼저 박살났다. 즉, 일본군이 자신들의 함선보다 월등히 큰 조선의 [[판옥선]]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격렬한 해류 위에서 난데없이 [[공성전]]을 치러야만 했던 것이다. 조선군 입장에서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화살, 창 등으로 상대하면 그만. 한가지 유의할 점은 처음 좌선 혼자 울돌목을 막았을 시점에 물살은 일본군에겐 유리한 순류였으며, 조선군에겐 역류였다. 일본군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유리한 물결을 보고 돌격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일본 수군의 전술은 고대~중세 해전에 머물러 있었다. 구조상 함포를 다는 것이 불가능해서 포격을 그대로 맞으면서 전진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는데, 전술도 배에 접근 후 도선해서 백병전을 치러 함선 내 인원들을 몰살한 후 빠져나오거나, 배에 불을 질러 전투불능으로 만드는 게 다였다. 그러나 접근해도 조란환, 화살 등이 위에서 날아오고 좁은 곳에 배가 밀집한 전투 상황상 아군의 배와도 뒤엉켜야 했으므로 정상적인 교전 자체가 성립하기 힘들었다. 더불어서 조선군은 강력한 화포들을 다량으로 적재할 수 있었다. [[천자총통]][* 다만 위 난중일기 기록에서도 나오듯 실제 명량 해전에서는 지자총통과 현자총통이 사용되었다. 천자총통은 너무 크고 화약을 많이 잡아먹는다는 지적이 나왔기 때문이다. 난중일기 등에서는 1593년 이래로 천자총통에 대한 기록이 사라진다. 사실 왜선은 내구력이 그리 좋지 않아서 지자총통 및 현자총통으로도 충분히 상대가 가능했다.]과 현자총통은 백여 개의 조란환, 혹은 [[대장군전]]을 쏴서 정면이든 원거리에서든 함선끼리의 싸움에서 엄청난 위력을 보여주었다. 당시부터 이미 저평가되고 있던 [[승자총통]]마저도 장대에 달아서 조란환을 쏘는 구조 덕분에 방어전에서 상당한 성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단, 이러한 화포들은 접현이 이루어지는 근접전에서는 그 활용이 제약되었을 것이다. 일본 함선들의 높이가 조선 함선(판옥선)보다 현저하게 낮으므로 접현시 지자 총통과 같은 대형 화포는 하향 사격을 해야 하는데, 이때 대포에 장전한 발사체가 흘러내릴 가능성이 높고 그것을 방지해주는 장치가 없어 하향 사격이 불가능했다. 포가의 앞부분이 높고, 뒷부분이 낮아 17도 이하의 사각을 선택하는 것이 구조상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하향 사격(Depressed Fire)을 할 때 이중 격목을 사용해서 포탄 등 발사체를 흘러내리지 않게 했지만, 현존하는 조선 시대 화약 무기 관련 문헌에서 이중 격목을 사용한 직접적 증거는 확인되지 않는다.(다만 승자총통의 경우엔 이중 토격을 사용하여 하향 사격을 가능케 한 부분이 존재한다.) 더구나 현재 학계의 연구처럼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사용한 포가의 형태가 동차라고 간주한다면 초단거리 하향 사격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대신 정상적인 교전이 벌어지는 50~200 미터 정도의 거리에서는 최고 효율을 발휘했다.] 크기 면에서~~만~~ 판옥선의 대항마라고 할 만한 [[아타케부네]]는 편성되지 못해서 일본 수군이 더 불리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긴 하다. 그러나 이전의 [[안골포 해전]]의 예시를 보면 알겠지만, [[아타케부네]]가 편성되었다고 해도 [[판옥선]] 앞, 그것도 독기가 바짝 오른 이순신의 기함 앞에서는 그저 덩치만 큰 목표물(...)이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안택선은 주로 다이묘 계급의 상징이었기에 전력상으로 의미를 가질만큼 수효가 충분하지는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고산공실록에는 좁은 해협을 보고 아예 편성하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 다만 이순신이 장계에서 붉은 깃발과 푸른 휘장을 두른 대선을 격파했다고 하고 총대장인 도도 다카도라가 화살에 맞은 것으로 보아서는 전투 후반에 판옥선들이 후방의 대장선에 당도하여 교전에 휘말리는 상황이 벌어졌을 수는 있다. 이 경우 운신이 어려운 좁은 지형에서 한두 척만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고 있으니 [[대함 미사일]] 격인 [[대장군전]]의 효용성을 검증하기 좋은 표적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첨저형 선박은 구조상 제자리 회전이 불가능하다. 거센 물살로 주위에 소선들이 어지러이 밀집된 상황에서 이런 선박이 기동하기란 아군을 짓밟는 팀킬을 하지 않고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것 역시 의도했을 것이다. 물살이 극도로 센 전장환경이 딱히 조선군에게 더 유리한 것은 아니고 서로에게 힘든 환경이기 때문에 심각한 전장환경으로 아타케부네를 편성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의도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판옥선과 화력의 우위라는 이 유리한 조건을 살리지 못하고 조선 수군을 말아먹은 [[원균]]을 생각해볼 때 아무리 조건이 좋더라도 그것을 사용하는 자의 능력이 변변찮으면 아무 쓸모도 없다는 것을 염두해둬야 한다. 반대로 이러한 이점들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유능한 지휘관 이순신을 만나자, 사실상 [[양민학살|'''전투는 대장선 혼자 하고 나머지는 그 대장선에게 학살당하는''']] 세계 해전 역사상 유래를 찾기 힘든 수준의 일방적인 전투가 가능했던 것이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kumi17cs1013&logNo=221451674186&parentCategoryNo=&categoryNo=23&viewDate=&isShowPopularPosts=true&from=search|명량 해전 당시 조선군의 군관 비중이 이전에 비해 높았다는 의견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